엘리자베스 2세는 1952년 2월 6일 아버지이자 선왕인  조지 6세 가 사망함에 따라 25세의 나이로 여왕의 자리에 올랐다.   

 

  빅토리아 여왕  이후로 최초로 맞이하는 여왕에 영국 국민들은 대체로 환호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후 70년 간 왕위를 지키며  제2차 세계 대전 의 영웅인  윈스턴 처칠 을 시작으로 사망 이틀 전 임명한  리즈 트러스 까지 총 15명의  영국 총리 [11] 를 지켜봤다

 

. 그가 왕위에 올랐을 당시에는 이미 현대적  입헌군주제 가 자리 잡은 상태였기 때문에 정치적인 실권은 없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2세는 자신의 영향력을 통해 영국을 위해 힘쓰려는 모습을 보였으며, 일례로 탈식민화가 진행되며 영국의 권위가 실추되던 때  영연방 을 지키기 위해 1953년 11월부터 6개월간 소속 국가들을 방문하였다. 영국 군주로서는 50년 만에 인도를 방문하였으며, 그 결실이 열매를 맺어 1977년 여왕 즉위 25주년에는 영국 연방의 35개국 지도자들이 축하 연회에 참석하는 영국의 권위를 회복시킨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그런 그조차도  다이애나 스펜서  사건으로 대표되는 자식들의 불행한 가정사는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찰스 3세  당시 왕세자는 당시 결혼한 부인인 다이애나를 두고  카밀라 파커 보울스 라는 여인과 불륜을 저지렀다. 이런 와중 다이애나가 찰스와 이혼한 뒤 파파라치에게 쫓기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자연스레 그 비난은 찰스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 향했다. 당시 왕실에 대한 비판 여론은 상당해 왕실 폐지론이 가장 높게 고개를 들었으며 현재도 찰스 3세는 그의 아들인 윌리엄 왕세자보다 인기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지만 엘리자베스 2세는 왕위 계승 이전 공주 시절부터 2차 대전에 운전병으로 참전하여 성실히 복무하고  윈저 성  대화재 당시 복구 비용으로 세금이 쓰이는데에 국민적 질타가 커지자 스스로 왕실의 면세 특권을 폐지하는 등 스스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려는 모습을 자주 보여 영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존경과 경의를 받아왔다. 국가원수 중 가장 많은 나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망하기 이틀 전까지 총리 임명과 같은 공식 일정을 소화해내며 여왕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2022년 9월 8일 엘리자베스 2세는 70년에 달하는 재위 끝에 향년 96세의 나이로  밸모럴 성 에서 사망하였다. 왕실은 전통에 따라 여왕의 부고 소식을 버킹엄 궁 대문에 걸어 알렸으며 영국은 10일 간의 추모기간을 가졌다. 전 세계의 국가 정상들과 기업, 유명 인사 그리고 수많은 대중들의 추모가 이어졌다

 

 

 

 

 

 

 

영국국가 https://youtu.be/P2IVWEyNngI (GOD SAVE THE QEEN)

일반적으로는 영국 여왕이라고 부르지만 1952년 즉위한 이래 영국 이외에도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파키스탄, 남아프리카 연방 등 32개 영연방 왕국들의 군주직을 겸하였다.

 

 그리고 2022년까지도 영국, 호주, 캐나다 등 15개국의 여왕이었으며 재위 중 공화제로 전환한 다른 17개국의 여왕이기도 하였다.[37] 이 때문에 엘리자베스 2세는 역사상 왕의 칭호를 가장 많이 가졌던 군주였다. 여왕이 역대 재위하였던 국가는 다음과 같다.

 

그리하여 여왕은 2022년 9월 8일까지 3개 이상의 국가의 수장[41]인 유일한 사람이었다.[42] 

 

또한, 재위기간 중 약 42년[43] 동안은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거느리는 국가원수이었으며, 재위기간 내내 가장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를 거느리는 군주이기도 하였다.

 

 1952년 2월 6일 즉위 당시 그녀가 거느리는 면적은 약 30,100,000km²에 달하여 당대 소련, 심지어 전성기 몽골 제국보다도 넓었고[44], 인구는 약 192,000,000명에 달해 당해년도 미국보다도 많았다.

 

또한 2022년 9월 8일 사망 당시에도 거느렸던 면적과 인구는 여전히 상당했는데, 면적은 18,800,000km² 정도로 러시아보다 더 넓었고, 인구는 135,000,000명으로 일본보다 많았다.

 

 

1926년 4월 21일 오전 2시 40분, 런던에 위치한 외가 메이페어에서 조지 5세의 차남 요크 공작 앨버트 왕자 요크 공작부인 엘리자베스의 2녀 중 맏이이자 장녀 제왕절개를 통해 태어났다.
엘리자베스와 저에게, 우리의 어린 딸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르실 겁니다. 저희 부부는 우리의 행복을 완성시켜줄 아이를 계속 기다려 왔었고, 드디어 아이가 태어났으니, 정말 신비롭고도 환상적인 기분이 듭니다.

1926년 4월 22일, 요크 공작이 어머니 테크의 메리에게 보낸 편지.
태어났을 당시 조지 5세의 첫 손주이자 큰아버지 에드워드 왕세자, 아버지 요크 공작의 뒤를 이어 계승서열 3위였던 만큼 그녀의 탄생은 대중에게 화제가 되어 많은 축복을 받았다.
하지만 일개 왕자의 딸인 방계 왕족이였던데다, 미혼이긴 했지만 큰아버지 에드워드 왕세자의 나이가 아직 젊었기 때문에 훗날 그녀가 여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5월 29일, 생후 1개월에 버킹엄 궁전에서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라는 이름으로 성공회 유아세례를 받았다.

 

엘리자베스는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으로부터, 알렉산드라와 메리는 각각 증조할머니 덴마크의 알렉산드라[45]와 할머니 테크의 메리의 이름으로부터 따왔다.

 

원래 아버지 앨버트 왕자가 할아버지 조지 5세에게 "아이의 이름을 빅토리아로 지어야 합니까?"라고 걱정스럽게 물었으나, "원하는 대로 하라"는 조지 5세의 뜻에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런던 하이드파크 코너에 위치한 자택과 리치몬드 파크의 화이트 로드지, 윈저 성, 밸모럴 성, 샌드링엄 하우스, 글래미스 성을 비롯한 외갓집 등을 오가면서 지냈다.

어린시절부터 가족 및 주변인들에게 주로 ‘릴리벳(Lilibet)'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는데, 이는 자신의 이름인 '엘리자베스'를 발음하기 어려워 해 본인 스스로 릴리벳이라고 부른 것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1920년대에 들어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었던 할아버지 조지 5세는 자주 병문안을 왔던 엘리자베스 공주를 매우 예뻐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는 조지 5세를 영국 할아버지(Grandpa England)라고 불렀다.

 

4살이 되던 1930년에 여동생 마거릿 공주가 태어나면서 언니가 되었다.
당시 학교를 다니는 상류층 여식들이 늘고 있었지만 엘리자베스는 여동생 마거릿과 함께 어머니와 가정교사 메리언 크로포드'[46]에게 교육을 받았다. 크로포드는 "매우 예쁘지만, 고집세고 영악하다"고 그녀를 묘사했다.
수업은 주로 역사 언어, 문학, 음악 위주였다.

크로포트가 저술한 책인 <The Little Princesses>에서 엘리자베스는 [47] 를 좋아했으며, 질서 있고 책임감 있는 성격이었다고 묘사됐다.
엘리자베스의 주변인들도 비슷한 말을 했는데, 2살 때의 그녀를 지켜 본 윈스턴 처칠은 아내에게 "어린 아이가 놀라운 권위를 가졌고 생각이 깊다"고, 이종사촌인 마거릿 로즈(Margaret Rhodes)는 "즐거운 어린 소녀이지만 근본적으로 분별 있고 예의 바르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비해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 왕실에 전해져 내려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33년 어느날, 엘리자베스가 여동생 마거릿에게 자신있는 말투로 "나는 3이고 너는 4야."라는 말을 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 마거릿은 "아니야, 나는 3이고 언니는 7이야!"라고 반문했는데, 한참 뒤에서야 언니가 말했던 숫자가 자신들의 나이가 아닌 왕위 계승 서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당시 엘리자베스의 계승서열은 3위, 마거릿은 4위였다.

 

1936년 조지 5세가 사망하여 에드워드 왕세자가 즉위하였으나 그해 말 월리스 심프슨과 결혼하기 위해 남동생 앨버트 왕자에게 왕위를 넘겨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고, 그의 장녀 엘리자베스가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되어 이전보다 더더욱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추정 상속인이라 왕세녀에 해당하는 Princess of Wales(웨일스 여공) 작위를 받은 적이 없지만[48] 실질적인 차기 왕위 계승자였다. 만약 조지 6세가 아들을 낳았더라면 계승 서열이 밀려 여왕이 되지 못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49] 어머니 엘리자베스 왕비가 두 공주를 모두 제왕절개로 낳아서 더 이상 출산하기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50]

그후 이튼 칼리지의 부총장 헨리 머튼으로부터 헌법사를 배웠고, 프랑스어는 원어민 가정교사를 통해 배웠다.

전쟁기간이던 1940년에는 안전을 위해 윈저 성에서 시간을 보냈다.

18세이던 1945년, 아버지 조지 6세의 허락을 받아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둔 시기에 영국군 여군 부대인 ATS[51]에 중위(subaltern)로 입대해 대위(junior commander)[52]로 진급하였다. 임무는 보급차량 운행이었다.

 

이 때문에 여왕이 제2차 세계 대전 때 일개 운전병으로 참전한 것으로 와전되기도 한다.[53]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끝났기 때문에, 비록 군에서 활동한 기간은 약 3주 정도였지만 세계 대전에 참전한 경력이 있는 마지막 국가원수였다.

 

엘리자베스는 1934년에 숙부 켄트 공작 조지 왕자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나의 결혼식에서 그리스와 덴마크의 필리포스 왕자[54]를 처음 만났고, 이후 1937년에 다시 만났다. 필리포스는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의 친손자로[55] 두 사람은 크리스티안 9세를 기준으로 7촌, 빅토리아 여왕을 기준으로 8촌인 먼 친척이기도 하다.

이후 1939년에 조지 6세, 엘리자베스 왕비, 마거릿 공주와 함께 왕립 해군사관학교를 시찰했는데, 13세이던 엘리자베스 공주는 당시 18세이던 필리포스 왕자에게 반해 편지를 주고 받았다.

 

필리포스는 조지 6세에게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을 허락받으러 갔었으나, 1947년, 공주가 21세 생일을 맞을 때까지 기다리는 조건으로 비밀리에 약혼했다. 그리고 1947년 7월 9일 약혼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그녀의 약혼은 몇몇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일단 필리포스 왕자는 사실상 망국의 왕자로[56] 지지해 줄 재정적인 기반도 없었고, 그의 누나들은 나치당원과 결혼하였는데 당시 영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나치 및 독일에 대한 감정이 최악이었다.[57] 

 

 

실제로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 필리포스와의 결혼을 반대하였고, 특히 필리포스가 독일 혈통[58]인 걸 항상 의심했으며 그를 독일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59].

 

결혼 전 필리포스는 그리스 왕국 덴마크의 왕자 직위와 계승권을 포기하고 이름도 영어식인 필립으로 바꾸고, 외가의 성인 '마운트배튼'을 사용하여 '필립 마운트배튼'으로 개명하면서 상기된 논란거리를 정리했다.

 

이후 필립 마운트배튼은 장인어른 조지 6세에게 에든버러 공작, 메리오네스 백작, 그리니치 남작 작위를 받았다. 두 사람은 1947년 11월 20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렸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반독 감정이 심했던 상황이었던지라 필립 공의 누나들은 아무도 참석할 수 없었다.[60] 엘리자베스 공주와 필립 공의 결혼식 정보

결혼 후, 1년 만인 1948년에 첫자식이자 후계자인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세손을 낳았고, 2년 뒤인 1950년에는 둘째이자 장녀 앤 엘리자베스 앨리스 루이즈 공주를 낳았다.

 

둘째 앤 공주를 낳은지 10년만인 1960년에 차남이자 셋째인 앤드루 왕자를 낳았다. 앤드루는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딸 베아트리스 공주 이후로 국왕이 즉위한 상태에서 태어난 자녀이기도 하다.

 

셋째를 낳은 지 4년 후에 막내 아들 에드워드 왕자를 출산했다.

 

그러나 결혼한 지 5년도 안 되어 조지 6세가 사망하면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찰스 왕세자 앤 공주에게 많은 애정을 주지 못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1953년엔 아이들을 두고 남편과 함께 영연방으로 6개월에 걸친 순방을 떠났다. 엘리자베스 2세는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하며 눈물을 보였으며, 훗날 순방을 마친 후 궁으로 돌아와 아이들과 상봉하던 순간을 “아이들은 끔찍하게 예의가 발랐다.

 

나는 그애들이 우리가 누구인지 정말 몰랐다고 생각한다.’라고 회고했다.

2021년 4월 9일 남편 필립 공이 99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74년간의 결혼생활이 끝났다. 국왕의 배우자 자리가 비어있는 것은 빅토리아 여왕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61]

 

국왕 조지 6세의 건강이 나빠져 가자, 1951년 11월 14일에 엘리자베스 공주 부부가 섭정으로 임명되어 1952년 1월, 영연방 순방을 떠났다. 그러나 케냐를 방문 중이던 1952년 2월 6일, 아버지 조지 6세가 암투병 도중 사망해 추정상속인이었던 공주가 해외에 나간 상태에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묵었던 트리탑 호텔(Treetop Hotel)[62]은 유명한 관광지이다.[63] 주변에 야생동물이 많아서 전설적 사냥꾼이자 자연보호운동가 짐 코벳 영국군 대령이 밤새 잠도 안 자고 경호를 서준 것도 유명한 일화. 부부는 이 소식을 트리탑 호텔에서 사가나 롯지(Sagana Lodge)로 이동했을 때 전해 들었다. 여왕에게는 남편인 필립이 수행원들을 물리치고 직접 소식을 전해주었다고. 엘리자베스는 영국과 영연방 전방에 여왕으로 선포되었고, 출국 할 때 공주였던 그녀는 여왕 신분으로 귀국했다.


암흑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엘리자베스 1세 빅토리아 여왕을 잇는 새로운 젊은 여왕의 시대가 열리자 여왕은 사람들의 기대와 지지를 한몸에 받으며 "동화 속 여왕"으로 묘사되었다.

관습대로라면, 여왕이 즉위할 때는 부군의 가문으로 왕조명이 바뀌었었기 때문에 윈저 왕조의 왕가가 마운트배튼 왕가로 바뀌느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 메리 대왕대비가 왕조명을 정할 당시의 합의사항으로 인해 "영국의 왕가는 앞으로 계속 윈저로 고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여왕은 1952년 4월 2일에 "왕조명은 윈저로 계속 한다"고 발표했다.

 정치에 일부 개입하는가 하면, 전쟁 등의 민감한 사안의 경우 여왕의 승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물론 여왕이 이를 거부한 적은 한번도 없긴 했지만, 불만을 표시한 적은 있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마가렛 대처 포클랜드 전쟁 개전선언인 아르헨티나 선전포고 결의안에 대해 엘리자베스 2세는 "불만족스럽다"고 거부권을 행사하지는 않았지만 불만 의사를 표현한 적이 있다. "부적절하다"고 했으면 거부권 행사인데, 당시 영국 여론이 전쟁 여론으로 기울어졌던 상황이라 포클랜드 전쟁을 막지는 않는 선에서 불만 의사를 표시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실질적인 권력 행사는 표면과 달리,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영국은 전세계 역사상 통치 전략이 가장 교묘하게 뛰어난 국가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법의 조항이 아닌, 영국인들의 심리에 대한 이해가 더욱 중요하다. 

 

영국인들은 귀족과 평민이 법적으로 평등한 신분제를 인정하고, 왕족들과 귀족들에게 사회적으로 부여된 의무를 이행한다면 그들의 권위를 인정했다. "그들은 자격이 있기에 우리와는 다르다."라는 주의인 것이다. 

 

이런 개념 탓과 제2차 세계대전을 성공적으로 치루어낸 핏줄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여전히 영국 대중들에게 절대적인 존재로 각인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법적으로 보장받는 권한과 별개로 초월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영국 총리들의 중요한 정치적 업무 중 하나가 바로 여왕을 알현하여 보고서를 올리는 것인데, 이 역시도 에피소드가 많다. 첫 총리인 윈스턴 처칠은 친한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시가를 피우면서 대담하는가 하면, 마거릿 대처가 왔을 때는 대처가 자신을 존경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15분쯤 기다리게 했다. 

 

 

 

포클랜드 전쟁 때 마거릿 대처의 전쟁 준비안을 승인한 뒤에 "내 아들이 이번 전쟁에 참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솔직히 내키지는 않았다. 그녀(대처 총리)가 너무 서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말하지 않았다."라고 전했다. 자식을 전쟁터로 보내는 모든 어머니들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장면. 야사 같은 이야기지만, 대처의 신자유주의 정책 등 정책 전반이 내키지가 않아 아침마다 "오늘은 그녀가 얼마나 내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했는가?"[72]라고 씹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래도 미운정이라고, 2013년 4월 17일 엄수된 대처의 장례식에 처칠 이후 처음으로 왕실 자격으로 참석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처음으로 여왕을 알현했을 때 "총리직을 맡게 된 걸 축하하오. 과인은 12명의 영국 총리를 만났소만."이라고 말해 캐머런을 쑥스럽게 만들었다.

1992년에 발생한 윈저성 대화재의 복구사업에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갈 것이라 추산되어 국민들의 반발이 있자 스스로 왕실이 가진 면세 특권을 포기했다.

 

때문에 그 이후로 영국 왕실은 지금까지 계속 납세의 의무를 지고 있다. 왕권신수설이 횡행하던 시대나 입헌군주제를 시행하던 무렵과 이것을 비교하면 정말 엄청난 변화인 셈이다. 즉, '같은 국민이지만 직업이 왕인 것'이라고 직접 인정한 것이다.

 

2018년 12월 29일 엘리자베스 여왕이 비밀리에 새로운 요트를 구매하기 위해서 로비를 진행한 것이 밝혀졌다.

 

버킹엄 수석 비서는 내각에 보내는 편지에 "여왕은 새로운 요트를 구매하고 싶지만, '대중들에게 공개되면 왕실 이미지에 큰 타격이 갈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다"고 적었다. 지금까지 다른 왕족들이면 몰라도 엘리자베스 여왕이 내각에 압력을 가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이 편지의 폭로로, 여왕도 사사로운 이유로 내각에 압력을 가했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2019년 9월에는 스코틀랜드의 왕실 별장인 밸모럴 성에서 휴가를 보내던 도중, 성을 방문한 미국인 관광객들에게 장난을 쳤다는 기사가 나왔다. 

 

여왕을 몰라본 관광객들이 "이곳에 사시냐"고 질문하자 엘리자베스는 "인근에 집이 있다"고 대답하고, "여왕을 만나본 적이 있냐"는 관광객들의 질문에 대해 "아직 만나본 적이 없다."라고 답하고 옆에 있던 수행원을 가리키며 "저 사람은 여왕을 만나 본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관광객들은 끝까지 여왕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엘리자베스 여왕은 거짓말은 전혀 하지 않은 채 관광객들을 속인 것이다.

 

2021년 4월 9일, 70년 넘게 해로한 남편 필립 마운트배튼 공과 사별하였다.

# 왕실 성명에 따르면 여왕은 부군을 기리기 위해 당분간 윈저 성에 남아있겠다고 밝혔다

 

. 2020년에도 코로나 때문에 윈저 성에서 보낸 시간이 많었으니 이상할 것은 없지만, 일각에선 여왕의 처소가 윈저 성으로 고착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79] 그리고 2022년 3월 6일, 여왕은 "앞으로 버킹엄 궁전을 떠나 남은 여생을 윈저 성에서 보낼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남편 필립공 99세로 별세(종합)

(런던=연합뉴스) 최윤정 특파원 =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남편 필립공(에딘버러 공작)이 99세로 별세했다. 버킹엄궁은 9일(현지시간) 성명을 내고 필립공이 이날 아침 윈저성에서 평화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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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선데이타임스는 "여왕이 빡빡한 개인 일정과 늦은 시간에 텔레비전을 자주 시청하여 신경이 쇠약해졌다"고 주장했다. 보도에 따르면, 여왕은 4월 필립 마운트배튼 공과 사별한 이후 혼자 있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족이나 친구들을 불러 계속 점심, 저녁을 같이 했다고 한다. 특히 자신의 자녀들을 키워준 동갑내기 유모 마벨 앤더슨과 함께 자주, 밤늦게까지 TV를 시청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2022년 5월 9일, 버킹엄 궁은 "여왕이 5월 10일에 열리는 의회 개회식에서 연설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발표했다. 여왕은 참석하기를 희망했으나 주치의들의 권고로 결국 참석하지 않기로 하면서, 개회식에는 찰스 왕세자 윌리엄 왕세손이 참석하기로 했다.# 의회 연설은 찰스 왕세자가 대독했는데, 이는 왕세자가 된 지 70년만에 처음으로 여왕의 역할을 대신한 것이다

현지시각 2022년 9월 8일 오후 6시 30분, 버킹엄 궁은 "여왕이 밸모럴 성에서 평온히 세상을 떠났다"고 발표했다.## 사망 당시 여왕의 곁은 장남 찰스 3세와 장녀 앤 공주가 지켰다. 앤드루 왕자 에드워드 왕자, 손자 윌리엄 왕자, 해리 왕자도 급히 스코틀랜드로 떠났지만 여왕 사망 후에 도착하여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고.

이어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버킹엄 궁 정문에 여왕의 사망 성명을 게시하였고, 여왕의 스코틀랜드 체류 중 사망 시나리오를 상정한 장례 프로토콜 유니콘 작전이 실행되었다.

 

향년 96세, 재위 기간은 70년 214일로, 영국 역사상 가장 장수한 군주이자 가장 재위 기간이 긴 군주이고, 재위 기간 동안 총 15명의 영국 총리를 승인하면서 가장 많은 총리를 승인한 국왕이기도 하다.

또한 유럽 역사상 2번째로 오래 재위하였고[96], 전 세계에서 여성 군주로는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하였다.

 

 

사회적인 일로 비유하면 프랭크 시나트라 LP 판에 노래를 녹음하던 시절부터 5G 시대가 도래한 지금까지 장수한 셈이다. 참고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데뷔 연도가 1954년,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연도가 1952년.

이렇게 영국 엘리자베스 2세가 오랜기간 왕위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대략 이렇다.
  • 25세의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96세까지 장수했다.
  • 정치체제가 입헌군주제[121]이므로 정치적으로도 논란이 될 일이 없다. 만약 전제군주제였으면 이렇게 오래 왕위에 앉아있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한 마디로 가늘고 길게의 전형적인 예다.[122]
  • 위에 이어 여왕 스스로도 모범을 보이고 왕실에 대한 지지도도 높다.

한국사와 비교하면, 일제강점기인 1926년 태어나,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부터 즉위해서 13명의 대통령이 거쳐갔다. 대관식 때 축하 사절로 갔던 사람이 신익희 당시 국회의장이고, 여왕의 즉위 선물로 전달할 초상화와 한국 풍경화를 그린 이당 김은호[123]라는 사람은 순종 황제 어진을 직접 그렸던 어진화사다.#

 

2017년 2월 6일 재위 65주년 사파이어 주빌리를 맞았다. 서구권 군주 가운데서는 기존의 최장수한 빌헬름 1세의 만 90세를 넘겨 최장수 군주가 되었으며,[125][126] 프란츠 요제프 1세(만 68년 재위)를 제끼고 2020년 1월 27일부로 근대 이래 가장 오래 재위한 서구의 (대국) 군주이기도 하다.

 

이제 남은 사람은 루이 14세뿐이다. 만약 5년만 더 살아서 재위 72년을 경신했다면 유럽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루이 14세의 기록을 갈아치울 수도 있었다.

 

여왕의 모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대비가 101세까지 살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왕이 96세가 되는 2022년 6월에는 재위 70주년을 기념하는 플래티넘 주빌리가 거행됐다.

 

 금연, 저녁 식사시 탄수화물 자제, 하루 식사를 네 끼로 나눠 소식하는 것 등을 장수의 요인으로 꼽았다.

 

2021년 4월 9일에 본인보다 유일하게 나이가 많은 왕실의 생존 인물이었던 남편 필립 마운트배튼 공도 타계하여 엘리자베스 2세 본인이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되었다.

만약, 2024년 5월 27일까지 여왕이 생존한다면, 프랑스 루이 14세를 제치고 전 세계[148]에서 가장 오래 재위한 국왕이 될 예정이었지만, 엘리자베스 2세가 해당 행사를 치르고 나서 석달 후인 2022년 9월 8일 사망함으로써 이 기록은 결국 깨지 못했다.

 

  • 즉위명은 영국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국왕인 엘리자베스 1세의 즉위명을 그대로 세습받아서 엘리자베스 2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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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만 당대의 장신이던 엘리자베스 1세보다는 작다. 영국의 여왕들 중에서 메리 여왕과 엘리자베스 1세는 현대기준으로 봐도 키가 크고, 빅토리아 여왕은 당시 영국 여자 평균 키보다 작으며, 엘리자베스 2세는 당시 영국 여자 평균 키보다 크다.

 

일국의 여왕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꽤나 자주 영국의 부자 스타들의 재력 측정기이자 영원한 기준이 되곤 한다. 예를 들어 폴 매카트니는 전재산이 여왕보다 많다던지[173] J. K. 롤링의 재력이 세계 555위로 여왕보다 높다는 식으로 자주 이름이 거론된다. 엘리자베스 2세의 보유 재산은 2015년 기준, 약 4억 2,500만 달러(약 5,063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재산은 5000억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89·사진)이 9일(현지시간)로 재임 63년 216일을 맞아, 빅토리아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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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얼굴마담으로 해외를 종종 국빈 방문하는데, 대한민국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1999년 4월 19일부터 3박 4일 일정으로 방한했다.[174] 

 

당시 여왕은 안동을 방문해 봉정사, 하회마을 등 몇 군데 명소를 방문했는데, 특히 하회마을에서 한옥을 방문할 때 화제를 모았다. 서양에서는 발을 밖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것을 금기시하는데, 좌식생활을 하는 한옥에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어야 하기 때문. 여왕은 한국 문화를 존중해 맨발로 들어갔고, 신발을 벗자마자 외신 기자들이 미친 듯이 플래시를 터뜨렸다.

 

이에 대한민국 기자들은 문화의 차이 때문에 어리둥절해 했다.

 

마침 방문 날짜에 73회 생일인 4월 21일이 끼어 있어서 간 김에 한식 전통 생일상도 받았다.[175] 엘리자베스 2세는 안동 하회마을에서 3박 4일 일정으로 사용할 의전 차량으로 대우 체어맨(쌍용 체어맨)[176]을 선택했다고 한다. 남편인 필립 공 현대 다이너스티 리무진을 탔다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영연방 국가를 방문하면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인도를 방문했을 때는 일부 인도인들이 야유하며 식민지 시절 자행된 학살과 약탈에 대한 사죄를 촉구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영어로 '영국의 위대한 암캐 여왕'이라 적힌 걸개를 들고 가는 곳마다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카퍼레이드를 하며 손을 흔들고 있는 여왕을 향해 달걀을 던지기도 했다.

 

인도 정부는 이들을 물론 처벌하지 않았고, 영국 언론은 "인도가 변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1970~80년대만 해도 여왕이 인도를 방문하면 인도는 식민지 시절 그대로 꼼짝도 못 했고, 인도도 국력이 강해지면서 식민지배의 앙금을 어느정도 풀게 된 것이다

 

  • 오랜 기간 전용차량으로 롤스로이스에서 특별 제작한 차량을 타다가 2002년 즉위 50주년인 ‘골든 주빌리’를 기념하여 벤틀리에서 새로 제작, 납품한 전용차량 ‘벤틀리 스테이트 리무진’을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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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이만 6.2m에 차체 높이는 1.77m로 리무진 차량 중에서도 대형인데, 이는 군주가 차량에 타고 내릴 때 고개를 숙이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이자 국민들이 차량에 탑승한 군주를 잘 볼 수 있게 하기 위한 설계로, 일본 등 다른 입헌군주국에서도 관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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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탄 및 방폭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외부 가스 공격에 안전하도록 실링 처리가 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뒷문은 뒤로 열리는 코치 도어로 되어 있고 여왕이 탑승중일 때는 왕실 문장 표지를 달고 다닌다. 과거에 자가용으로 로버 P5B를 소유한 바 있으며, JGY 280이라는 번호판을 달았다고 한다.

 

영국 파운드와 영국 속령에서 사용하는 지폐의 모델이다. 또한 호주 달러 캐나다 달러, 뉴질랜드 달러 지폐와 동전의 모델이다

  • 견과류를 매우 좋아한다. 2013년 12월 13일경 영국 언론지 now의 불법 도청 사건에 대한 재판이 열린 적이 있었다. 이 때 법정에 증거자료로 제출된 이메일 내용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왕실직원들이 여왕을 위해 준비한 땅콩, 아몬드, 캐슈넛 등의 견과류를 항상 궁전 복도에 놓아두는데, 순찰 중인 경찰들이 너무 많이 집어먹어서 여왕이 화가 났다고. 여왕은 그릇에 줄을 그어서 표시한 후 내 땅콩에서 그 끈적거리는 손을 치우라는 메모를 남겼다고 한다.[186]  초콜릿도 좋아해서, 주변 사람이 말리지 않으면 한 접시 정도는 다 먹을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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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여권 문서에도 나와있는 내용이지만, 엘리자베스 2세에게는 여권이 없다.

 

이는 영국과 영연방 왕국의 모든 여권은 국왕의 이름으로 발행되는데, 군주인 국왕이 여권을 소지하는 것은 엄연히 신하인 외교부 장관에게 여행 가도 되냐고 허락받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이라고. 이건 일본도 똑같아서 천황도 여권이 필요없다. 영국처럼 군주가 신하인 외무대신에게 허락을 받는다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뜻. 

일본 여권 문서 참조. 물론 영국이나 일본이나 군주 이외의 왕족/황족은 여권이 필요하다

모계로 이슬람교의 선지자 무함마드의 후손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물론 학자들 사이에서는 논쟁이었지만, 요약하자면 스페인 알폰소 6세의 첩 혹은 부인인 세비야의 자이다 공주[189]가 거슬러 올라가면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후손이라는 것. 그리고 스페인 왕족들과 영국 왕족들의 결혼으로 그 피가 이어진다는 것이다

 

  • 애완견은 원래는 코기를 키우다가 하나 둘 세상을 떠나면서 개 입양을 하지 않고 있다. 도기(dorgi)종 애완견인 '벌컨(Vulcan)이 무지개 다리를 건너면서 '캔디'라는 이름을 가진 도기종 애완견 1마리만 남게 됐었는데, 2021년 3월 필립 공이 세상이 떠나기 전 '퍼거스(Fergus)'[190] 라는 도기와 '믹(Muick)' 라는 코기를 분양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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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립 공이 사망한 이후 앤드루 왕자, 베아트리스 공주, 유제니 공주가 몇 마리의 코기들을 여왕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여왕이 사망한 이후, 앤드루 왕자가 선물한 믹(Muich)과 샌디(Sandy)라는 코기는 앤드루 왕자와 사라 퍼거슨이 키우기로 했다. 이 두 마리의 코기들은 여왕의 장례식에서 잠깐 밖으로 나와 여왕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도 했다.

닌텐도 Wii을 좋아하며 플레이하는 걸 즐긴다고 한다. 손자며느리 캐서린 미들턴이 손자 윌리엄 왕세손에게 선물한 Wii을 좋아해서 결국 여왕의 소유가 되었다고. 특히 볼링을 좋아하며 매우 잘 한다고 한다

 

 

 

 

공식 사망 발표 시각은 대한민국 표준시로는 9월 9일 오전 2시 30분. 영국 시각으로 9월 8일 오후 6시 30분(서머타임 기준)경이다.

 

영국 신분제는 참 복잡한데, 일단 왕족ㆍ귀족에게 제도상 특권은 없다. 있는 거라면 귀족의 경우 전통적으로 군인이었으므로 사관학교 특례입학이 가능하다는 정도. 귀족원과 서민원이 따로 있고 그 권한을 마치 미국의 상원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서민원의 의견을 거부할 수 없다. 간단하게 전통이라 없애지 않고 남겨두는 거라 귄한이 없다.

 

게다가 최근 수십년 동안 비왕족귀족작위는 수여된 적도 없다. 오히러 대가 끊기는 귀족가들이 나온다. 소설이나 역사책에 나오는 근대 왕국ㆍ제국 같은 느낌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혀 아니다. 그냥 소선거 구제기반의 의원내각제국가다. 국왕한테 허락을 맡네 마네 하는데 국왕이 의회에서 통과된 안건을 거부한 적이 없다.

 

거부하면 괜시리 긁어 부스럼이고, 국왕의 권한은 그냥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사석이나 사적으로 말하면 그게 국왕이라서 큰 영향력을 가지는 게 전부다. 그마저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전통이 오래되긴 했어도 봉건적이라고 매도하기는 어렵다.

 

기억하자, 이 나라도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왕의 목을 겨누었던 나라다. 게다가 프랑스 대혁명보다 훨씬 전에 있었던 일이다. 물론 "귀족 같은 것 없이 국가수반도 일반 대중에서 선출되는 민주공화국에 비교하면 구시대적"이라는 말은 부정할 수 없지만 말이다.

 

안동방문 영상  https://youtu.be/vJq6IpoK4Xc 

 

런던 올림픽 개회식 영상 https://youtu.be/1AS-dCdYZ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