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푸우의 여행매거진]북미회담 보안담당 

전투종족 구르카 용병




1.1. 구르카 용병의 역사


1.1.1. 전투종족, 영국 육군의 용병이 되다



1803년 이래 네팔의 

구르카 정부는 인도의 

국경지대를 노골적으로 침범하여,

영국을 도발했다.


특히 인도 북부의 영국령 촌락을

 약 200개나 병합하고 갠지즈강() 상류까지

 침략할 기미를 보였다


영국의 인도총독 민트 경()은 이 지역은

 영국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네팔은 계속 권리를 주장하여 

양도하지 않았으므로

새로 부임한 총독 모이라 경이

 비상수단으로 현지에 경찰서를 

설치하고 강경한 태도로 임하였다.


 

당연히 구르카 측이 

가만있지 않고 1814년에 그 경찰서를 습격,

 18명의 경찰관을 

살해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영국도 이에 대응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4개 부대로 편성하여 

네팔로 진격시켰다

히말라야산맥의 험난한 지세를

 이용한 구르카족은 여러 성새(城塞)

 중심으로 완강히 저항함으로써 영국군은

 초전에 고전하였으나



서틀레지 방면으로 진격한 

사령관 D.옥털로니의 분전으로

 요새를 차례로 격파하고 구르카군의

 최후거점인 마룬 등의 요새를 격파함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한다.


패배한 구르카측은 항복하여 

영국과 사가우리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교원에서 출간한 랜드 앤 피플에 따르면

 이 당시 영국군은 구르카 족의 

용맹함에 치를 떨면서도 영국 

측에게 점심 먹을 시간이니 

전투를 중지할 것을 요청하고




당신들의 티타임 

동안에는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구르카족의

 매너에 감탄했다는 모양.

 

특히 구르카족이 머리가

 날아간 상태에서도 영국군을 향해 

계속 칼을 휘둘렀다든지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쿠크리(구르카족이 쓰는 유일한 칼)

 하나를 들고 왔다던지 하는

 이야기도 적혀있으며

 전쟁 막바지에는 휴식시간에 

영국이나 구르카 족이 서로

 간의 부상자를 치료해주는 훈훈한

 광경도 나왔다는 모양.



어쨌든 이러한 사례를 

바탕으로 구르카족이 적이었으나 

그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고,


그 결과 영국군에서도

 이들을 받아들이는데 큰 

거부감이 없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1차 전쟁(1839~1842)에서 호되게 털린 영국은 

당시 영국군 및 인도계들로 이뤄진

 영국군이 전멸( 1명만 살아 돌아옴)당한 것을 

교훈삼아 산악전의 고수인

 구르카병을 2차 전쟁이

 벌어진 1878년에 대거 파병했다

그리고 카불 점령에 크나큰 공을 세웠다.

 

1차 세계대전에서는

20만이 넘는 구르카병이 

참전하여 용맹을 떨쳤다

. 이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먼저 진격하며 전설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물론 4만에 이르는 구르카병이

 전사했을 정도로 이들의 피해도 컸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벌어진 

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구르카군이 대거 파병 나갔지만


 영국은 1차대전의 피해도 엄청났던

 터에 여기에 총력을 다할 수 없어서 

지원도 흐지부지된 상태였고,

몇 달 안 가 전쟁은 대충

 끝났던 탓에 구르카군은

2차 전쟁과 달리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2차 세계 대전에서의 구르카 


 

구르카병이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린 건

2차 세계 대전이다.


 1차 대전이나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별다른 사진 자료나

 취재 기록이 없었던 거랑 다르게 

2차 대전에서는 상당한 자료와 취재가 

이뤄졌기 때문


북아프리카에서는

 독일 국방군을 상대로

동남아시아에서는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했다




독일 아프리카 군단 장병들의 

증언에는 이들이 밤마다 독일군의

 진지를 기습해 장병들의 목이나 귀를

 베어가는 공포의 존재로

 각인되어 있고, 실제로 이들의 

전과를 의심하는 영국 육군 장교 앞에 

적군에게서 따온(?) 귀를 한바구니

 보여주기도 했다


일본 육군은 정글전에

 능해서 영국 육군 지휘관들이

 정글에서 싸우기를 꺼려 했는데

, 그러자 구르카족은 이 

정글에서 일본 육군을 

쿠크리 칼로 사냥하고 다녔다.

 


 

2차대전 당시 이들은 쿠크리(구르카족 칼)

 하나로 일본 육군들을 대적한 

기록이 나와있으며 일본도를 단숨에

 동강내고 쿠크리 하나로 

일본 육군 15명을 베어죽인 구르카병 

이야기도 나온 바 있다


이 사람은 당시 취재에서도

 나와 인터뷰했는데 수수한 옷차림에

 훈장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고 있었다. 당사자는 

매우 자랑했고 마을 사람들도

 전설의 용병으로 알아준다고 

인터뷰했다

그리고 수수한 옷차림과 달리 

영국에게 두둑한 연금을 

받으며 매우 부유층이었다.


 

여러모로 남쪽의 

전투민족과 닮은

 꼴이 많은 민족이다.

 

코만도스 2의 인도 차이나

 전선 관련 임무에서 

구르카 용병들이 등장한다.

 






비슈누 쉬레스타 (인도 육군 상병)

실사판 '아저씨'라고 보면 된다.

한 구르카 부대 전역 군인이

 기차 안에서 강도들의 약탈과 

강간 시도를 저지하며 

강도들과 15~40 1로 

맞서 싸워 어린 소녀를 

비롯한 승객들을 지켜낸 실화.

 

 

 

1.1.7. 구르카병과 30명의 탈레반들

네팔 비마 출신의 영국

 육군 구르카 연대 1대대 소속,

딥프라사드 푼(Dipprasad Pun) 하사(31)

2010 9 17, 아프간 헬만드 주[3] 라힘 칼라이 근처에 

있는 기지에서 야간 경비 근무를 서다가

전방의 어둠 속에서 뭔가

 땅파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처음 짐승의 소리인줄 알았으나

 소리의 정체는 IED를 매설중이던

2명의 탈레반들이었다.

 

그의 소대는 순찰을 나간 

시점이었기에 그는 즉시 무전기로

 지휘관에게 보고하고, 삼각대에 

거치돼있던 GPMG 1문을 떼어들고

개인화기인 L85A2 Picatinny Rail 한 정과

 하부 레일에 부착된 유탄발사기

 한 정, 수류탄 다수, 무전기 두 대를 가지고 

지붕으로 올라간 후 사격을 개시했다




탈레반들도 RPG를 발사하고 

사격을 가해왔으나, 푼 하사는 15분 이상 

그 위치를 사수하면서 400여발의 탄환과 

수발의 수류탄 등등 손에 잡히는 

무기를 몽땅 사용해 최소 세 명 이상의

 탈레반을 죽이고 다수를 부상 

입혔다고 한다


처음엔 겁이 났지만,

교전을 시작하자 그런 생각은 

싹 사라진 채 전투에 임했다고 한다.

 

 오오, 구르카 오오 그는

"마추 탈라이(Marchu Talai)!" 라고

 소리지르며 탈레반에게 달려들었다


그 말은 네팔

 말로 "지금 만나러 갑니다 

지금 네놈을 죽이러 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홀로 30여명의 탈레반들을 

물리친 공훈으로, 푼 하사는

2011 3 25

용훈십자훈장(Conspicuous Gallantry Cross)을 받았다.

 

 

1.2. 선발 과정


구르카의 급여나 연금은

 원칙적으로는 영국군과 

동등하다.## 2015년 기준으로

 일병이 년간 18,000파운드, 우리 

돈으로 약 3300만 원 정도인데



네팔은 연간 국민소득이 

같은 시기 한국(27000달러)

70분의 1 수준인 400달러(50만 원정도)

 좀 넘는 최빈국(2015년 기준)이므로

 구르카로 복무하고 

전역한 사람은 부유층으로

 살 수 있다. 그래서 매년

2~300명 선발에 경쟁률은 50 1을 넘는다


. 체력 테스트뿐만 아니라 영어, 수학

면접 등 다양한 전형을 요구하기 때문에


 사회 엘리트인 대학생들이

 몇 년씩 구르카 준비에만 매달려 

사회 문제가 되고 있으며,


카트만두에는 구르카 준비를 

위한 사설 학원만도 20여개가 성업 중이다.

그야말로 네팔판 

한국식 공무원 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08년도 기준 경쟁률이 700:1을 넘는다

. 2015 2월 기준으로 

영국군 가운데 구르카 출신은

 장교가 110, 사병이 2,610명 수준이었다.


 


특히 최근에는 사교육을 

많이 하는 도시민의 합격률이

 높아지고 있다. 한 해 40명 선의 합격자

를 배출한다는 유명 사설학원의

 수강료는 한화 월 3만 원으로 한국이라면

 용돈수준이나 네팔에서는 부유층이거나

 구르카 출신의 아버지가 

있지 않으면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이다.


이런 학원은 전직 구르카 출신이 

운영하며 영국군의 선발전형에 맞춘 

커리큘럼으로 교육을 한다


반면 지방민이나 저소득층은

 밭일이나 평소 운동 등으로 체력을 

단련할 수밖에 없고, 영어나 수학도

 이들에게는 큰 장애물인데 

네팔은 아직 학교조차 없는 

지방이 많기 때문이다.




선발과정을 좀 더 살펴보자. 

구르카 출신 모병관이 가을에 고향을 

돌면서 지역 예선을 실시한다.

여기서는 키와 가슴둘레 등 신체조건과

 기본적인 체력 테스트를 치르며 

2~3배 수를 선발한다.[7] 


예선통과자들은 포카라에 위치한 

모병소에 입소하여 보름간 최종 경선을 진행한다

. 이때 입소자는 가족의 응원을 

받으며 모병소로 들어가는데 마치 

한국 수능 등굣길 분위기이다


다양한 선발 전형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역시 체력

 테스트로서 다양한 

과목을 수행하는 중에

 하나라도 미달되면 그 즉시 탈락이다.

 

그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도코 레이스'인데, 25kg의 

돌을 채운 전통바구니(도코)를 끈으로

 머리에 매고 네팔의 가파른 산길 6km

 달리는 것. 삼십분대를 달성해야,

10분 기준 2km를 달려야 

합격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하며


 중간에 쉬거나 48분을 넘기면 바로

 탈락. 부대마다 다르겠지만 

한국군이 급속 행군시 

완전군장으로 10km 

1시간10~1시간30분안에 달리는

 것이 목표니 10분 기준 1km가 좀 넘는다.

 

최종 선발된 인원은

 영국 여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하고 다음해 1월 영국

 본토로 가서 8개월 동안 

정규군 훈련을 받는다.

 



한편 영국군 외에 싱가포르경찰 

및 인도군도 구르카를 선발한다

싱가포르 경찰은 영국군 

선발에서 차순위자들을 데려가고


싱가포르의 구르카도 

영국군보다는 급여가 좀 낮긴 하지만 

네팔기준으로는 아주 높은 편이라 

인기가 아주 많다. 2014년 기준으로




 월 1,500~2,000유로(년간 2600만원 정도)를 

받는다. 1년에 300명쯤 뽑는데 

2014년에는 14,000명이나 

경쟁자가 몰렸다고 한다

 많을때는 경쟁자가 2만명이

 넘는 해도 있다고 한다.

 

인도군은 별도의 선발 시험을 실시한다

이쪽은 급여가 덜해서 경쟁률도 낮다

그렇긴 해도 인도군 소속 구르카들도

 보통 네팔인 노동자보단 당연히 많이 받는다.


영국군 출신처럼 부유층은 되기 

어려워도 장기복무하면 중산층은 

될 수 있다. 그래서 영국군 선발에 

최종 불합격하면 다시 인도군 선발에 

도전하는 경우도 많다고


영국군 구르카보단 경쟁률이 낮다

 뿐이지 여기도 경쟁 자체는 치열하다

인도 열차 강도사건의 

영웅 비슈누 쉬레스타도

 여기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보면 전투종족 레벨은 거기서 

거기라고 보면 될 듯.

 


 

이들을 상징하는 칼로 쿠크리를 꼽는다

부대 문양도 쿠크리 두 개의 검날을 교차한 것.

 

 

싱가포르 경찰 소속 

구르카들은 경찰임에도 쿠크리를

 차고 다닌다. 도구니까

 

구르카들은 일부가 독일군과의

 전투에도 참전했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군도 

북아프리카 산악에 거주하던 

모로코 출신 유목민 구미에(goumier)를 

용병으로 고용했는데, 이들도 근접전에선 

엄청나게 강해서 나치군들은 

이들과 근접전으로 싸우느니 하루 종일

 포탄 세례를 받는게 낫다고 

치를 떨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구르카와 이들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라며

 연합군들이 궁금해했지만

 이들은 일절 싸울 일이 없었기에

 이 농담에 대한 진실은 가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프랑스 

육군 장교가 야습을 준비하는 용병

 곁을 지나가며 혹시 쓸만한 손목시계가 

있거든 하나 루팅구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다음날 아침에 그 장교 막사 

입구에 손목시계가 원래 주인의 

손목째로(!!!) 공손하게 놓여 있더라고 

한다(구르카나 라지푸트 등에 가려져서 그렇지,

구미에들도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의 

산악지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에 대한 일화들이 '타임 라이프 2차 

세계대전사'에 일부 실려 있다.

 




미군이 구르카병처럼

 용병부대로 삼을 계획을 하던 

나라가 바로 몽골군이었다고 한다


. 해외 주둔 미군 모습을 다룬 저서 

<제국의 최전선>에 따르면 몽골에 파견된 

미군 장교들은 몽골 군인들을 

구르카처럼 미군에 복무하는

 외인부대로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고 

저술하고 있다.

 


2018년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는

 싱가포르 센토사 섬 카펠라

 호텔의 치안 유지를 위해 회담장

 주변에 구르카 용병들이 배치되었다.


북미정상회담 김정은 숙박 장소인 싱가포르 세인트 레지스 호텔(비디오.동영상)


북미정상회담 트럼프 숙박 장소인 싱가포르 샹그릴라(Shangri-La) 호텔


북미정상회담 장소인 싱가포르 카펠라 호텔 Video.동영상


 [ 싱가포르 4편]-센토사섬.루지


[싱가포르 2편]-가든즈 바이더베이.플라이어


[ 싱가포르 1편]-머라이언공원.칠리크랩